Literature Note

[책 8] 제텔카스텐 by 숀케 아렌스 - 지식노동의 생산성 가속

minstack 2025. 8. 24. 18:59

 minstack.log에 글 하나 올리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책을 읽고 나서 “이건 써야겠다” 싶으면, 다시 책을 펼쳐 인용구를 발췌하고, 글의 방향을 구상한 뒤 문장을 쓰고 퇴고하고 업로드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매번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게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 해도 적어도 두세 시간은 잡아먹는 지난한 작업이다. 전업 작가라면 몰라도, 본업이 따로 있는 불쌍한 직장인에게 이 반복은 지속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글쓰기는 언제나 백지에서 시작하는 듯한 두려움과, 매번 같은 고통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피로감을 안긴다.

 

 그렇다고 이 피로가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이나 소위 "노오력" 부족 때문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프라이싱은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어 왔고, 이제는 지식노동조차도 마찬가지다. 블로그판, 유튜브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새로운 정보’만으로도 경쟁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흔한 정보는 공개되는 즉시 AI가 조합해 콘텐츠를 찍어낸다. 그것도 물량공세로.

 

 이런 시대에 휴먼이 같은 주제를 다뤄도, 뻔한 어조와 피상적인 견해를 내놓는다면 AI의 상대가 되기 어렵다. GPT는 이미 복붙형 똥글을 몇 초 만에 양산하고 있다. 인간이 몇 시간을 들여 쓴 글도 AI는 몇 초 안에 복제할 수 있다. 기계와 물량전으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는 글쓰기조차도 생산성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 근성론의 프라이싱은 최저임금보다 한참 아래고, 이에 근성을 발휘할 일자리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꺼내든 책.

『 제텔카스텐』 by 숀케 아렌스

원제: How to Take Smart Notes

인간희극. 2021년 5월 발행. 247 page. 16,000원.

개정판 나오기 전에 산 책임

 

제텔카스텐(Zettelkasten) 방법론의 고전으로 꼽힌다.

 


허구적 선형성(Fictional Linearity) 그 자체가 문제

아렌스는 기존 학술적 글쓰기에서 흔히 제시되는 ‘주제를 정하고 → 계획을 세우고 → 자료를 모으고 → 글을 쓰는’ 단계적 로드맵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실제 글쓰기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글을 다 쓴 뒤에 떠오르기도 하고, 자료는 초고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필요성을 느낀다.

대략적인 순서는 늘 똑같다. 무엇을 쓸 것인지 정하고, 연구 계획을 세우고, 연구한 다음, 글을 쓰는 것이다. 퍽 흥미롭게도 대개 이런 로드맵에는 이것이 그저 이상적인 계획에 불과할 뿐이며 현실에서는 계획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조가 깔려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글쓰기는 그렇게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것이 될 수 없다. -p78

 

글쓰기는 직선이 아니라, 우회와 비약, 분기와 연결이 반복되는 네트워크적 과정이다.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고 ‘스마트한 메모’에서 출발해야 한다.

허구적 선형성 fictional linearity 그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형적 순서와 단절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스마트한 메모를 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선형적 과정이 아닌 순환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작업 흐름의 구조를 짜면,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가 감지될 것이다. 그러면 주제를 찾는 일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주제가 생겨서 문제가 된다. - p81

 


핵심 개념: 모듈화와 네트워크화

아렌스가 제시하는 방법론은 단순하다. “백지에서 시작하지 말라.”
글을 쓰려 할 때 처음부터 짜내지 말고, 평소 쌓아둔 노트에서 출발하라는 것이다.

  1. 모듈화:
    노트 하나에 하나의 아이디어만 담는다.
    여러 아이디어를 섞어두면 검색도 어렵고 연결도 불편하다. 마치 조립하려는 레고에 이미 붙어 있는 블록이 섞여 있다면 다시 분해해야 하는 것처럼 비효율적이다.
  2. 네트워크화:
    이렇게 분리한 노트들을 연결한다.
    노트 하나는 의미 없지만, 서로 연결되면 맥락이 형성되고 창발적 결합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생산성은 모듈화·프로세스화·자동화’라는 노트는 ‘제텔카스텐은 생산성을 가속화한다’라는 노트와, 나아가 ‘GPT 시대 글쓰기 생존 전략’과 연결될 수 있다.
영구보관용 메모 쓰기도 마찬가지다. 단지 이 과정에는 위와는 또 다른 피드백 루프가 내장되어 있다.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면 정말로 철저히 생각한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새로 적은 생각을 먼저 적은 메모들과 합치려는 순간, 시스템을 통해 모순과 일관성 부재, 그리고 반복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내장된 피드백 루프가 동료나 감독자의 피드백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항상 곁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가 조금씩 발전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내장된 피드백 루프가 유일하다. - p88

 

글쓰기는 직선이 아니다.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는 순차적인 흐름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우회하고, 비약하며, 분기와 연결이 반복되는 네트워크적 과정이다. 이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스마트한 메모’다. 다시 말해, 백지에서 시작하는 대신 이미 쌓아둔 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모듈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연결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여러 아이디어를 한 노트에 뒤섞어두면 나중에 쪼개 쓰기도 어렵고, 서로 다른 문맥에서 연결 짓는 것도 힘들어진다. 마치 레고 블록 여러 개를 한 덩어리로 붙여서 상자에 넣어두는 것과 같다. 사용할 때마다 다시 분해해야 하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나의 노트에 하나의 아이디어만 담는 식으로 정제하면, 어떤 문맥에서도 손쉽게 꺼내 쓸 수 있다. 이게 바로 모듈화의 힘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듈화된 노트들을 서로 연결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조합을 넘어선 창발(emergence)이 발생한다. 서로 다른 아이디어가 낯선 문맥에서 엮이며, 애초에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 창발의 구조는 마치 인간의 신경망과도 유사하다. 뉴런 하나만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수천 개, 수만 개가 시냅스로 연결되면 복잡한 사고와 감정, 행동이 가능해진다. 제텔카스텐의 노트도 같다. 하나하나는 단순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연결되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사고의 회로를 형성한다. 특정 순간에는 이 회로가 자극을 받아 반응하고,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자발적으로 구성해 낼 만큼 강력한 동력이 된다.

즉 이 방법론의 목표는 단지 메모를 잘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 간 연결망’을 통해 새로운 인지 구조를 외부에 구축하는 일이다. 글쓰기란 결국 생각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며, 제텔카스텐은 그 구조를 사전에 만들고, 언젠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도록 하는 인프라에 가깝다.


1차원 vs 2차원 생산성 모델

하지만 만약 여러 사실들이 서로 분리된 상태로 있거나 고립된 방식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 네트워크 또는 “격자형 정신 모형 latticework of mental models”안에서 서로 뭉친다면,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지고 학습 능력과 기억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필요한 맥락에서 그 정보를 가져오기도 쉬워진다. - p90

기존의 글쓰기는 철저히 1차원적 생산 방식이었다. 아이디어 → 자료 → 초고 → 퇴고. 이 모델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지만, 문제는 매번 같은 공수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글 한 편을 쓰든 열 편을 쓰든, 노동 투입은 늘 선형적으로 늘어난다. 반면 제텔카스텐은 2차원적 모델이다. 초반에는 결과가 더디게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노트를 쌓는 과정은 눈에 잘 띄지 않고, 당장 글 한 편을 생산해내는 것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네트워크가 촘촘해지면, 연결에서 창발이 일어난다. 이전에는 몇 시간씩 걸리던 글쓰기가, 어느 순간 노트들을 조립하는 몇십 분의 작업으로 축소된다. 마치 2차 함수 곡선처럼 초반엔 느리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하는 것이다.


왜 늦게 왔나?

그렇다면 왜 이런 생산성 향상은 그동안 지식노동 영역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지식노동은 공장의 물건 생산과 달리 네트워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만들 듯 공정을 분리하고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는 방식은 글쓰기나 연구에는 맞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우회하고 비약하며, 서로 다른 지점에서 뜻밖의 연결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래서 지식노동은 장기간의 경험과 암묵지 축적을 통해서만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텔카스텐은 이 네트워크적 특성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강화한다. 노트 단위로 아이디어를 분리하고 연결망을 확장하는 작업은, 인간 두뇌가 자연스럽게 수십 년에 걸쳐 만드는 네트워크를 외부화하고 가속화하는 방식이다.


Private LLM으로 확장

그리고 이 축적은 단순히 개인의 글쓰기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수천, 수만 단위로 확장된 노트 네트워크는 곧 하나의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미래에는 이를 학습한 프라이빗 LLM이 개인 전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 GPT가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를 조합하는 수준이라면, 프라이빗 LLM은 내 사유와 내 경험, 내 언어 습관이 반영된 전용 모델이 된다. 결국 제텔카스텐은 지금 당장은 글쓰기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방법론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개인 지식의 사유화와 초가속화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투자다.


실행의 어려움

이러한 효과와 가능성은 이제 머리로는 알겠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들어가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단순히 새로운 도구를 배우는 차원이 아니라, 평생 몸에 밴 사고 방식 자체를 바꾸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학교와 직장에서 주입식 교육과 선형적 프로세스에 절여져 왔다. 정답을 외우고, 계획을 세우고, 순서대로 실행하는 식의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제텔카스텐은 그와 정반대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인간은 사실 시스템2로 깊이 생각하는 순간이 살면서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일상은 자동화된 습관과 직관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이 방법론은 글을 쓸 때만 집중해서 쓰라는 게 아니라, 평소의 모든 순간에 떠오른 생각을 포착하고 기록하며,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도록 강제한다. 단발적인 작업 방식이 아니라, 매일의 사고 습관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불편하고 낯설 수밖에 없다.

둘째, 초기에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 노트를 수십 개, 수백 개 쌓아도 글이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은 더 들고, 성취감은 적다. 마치 운동 초기에 근육통만 있고 몸은 그대로인 것과 같다. 그래서 동기부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성과가 가시화되기까지 인내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이거 나랑 안 맞는 것 같아”라며 포기해 버린다.

셋째, “아이디어 하나 = 노트 하나”라는 원칙은 생각보다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하나의 아이디어’인지, 어느 순간에 분리해야 하고 어느 정도 길이로 남겨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결국 이건 책에서 정답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문제다. 이 모호성이 실제 활용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맞는 노트 쓰기 방식이 다듬어진다.

 

결국 제텔카스텐은 단순한 메모 요령이 아니라, 사고 구조 자체를 갈아엎는 혁신이다. 그래서 쉽지 않고,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나 역시 여전히 서툴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적응해 가는 중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낀다. 이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변화라는 점이다. AI가 똥글을 무한히 양산하는 시대에,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1차원적 글쓰기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내 안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창발현상을 자산화할 수 있는 방법론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1507746

 

제텔카스텐 - 예스24

7개국어로 번역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제텔카스텐〉 최신 개정판!논문, 에세이, 보고서, 논픽션…. 생산적인 글쓰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늘 생각만 많고 결과물은 부족한, 바

www.yes24.com